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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좋은 삼형제 시화전 “둥근 세모”

-신정범(愼釘範), 신형범(愼炯範), 신재범(愼栽範) 삼형제 서화전을 기리면서

    근원 김양동/계명대학교 석좌교수

 

거창 愼氏 명문가에 유명한 삼형제 서화가가 있다. 백씨(伯氏)인 신

정범(愼釘範)과 중씨(仲氏)인 신형범(愼炯範), 그리고 계씨(季氏)인 신

재범(愼栽範) 삼 형제가 그들이다. 이 삼 형제가 “둥근 세모”란 주제어

를 가지고 합동전을 개최한다. ‘둥근’이란 것은 같은 혈연적인 뿌리를

은유하고 ‘세모’란 것은 서로 다른 예술적 표현 방식을 상징한 의미로

해석된다. 형제의 동질성과 예술적 개성을 버무려 전통적인 동양 미학

의 세계를 함께 걸어가는 아름다운 형제의 모습은 거창 신씨 명문가의

후예로서 높이 칭양 받을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현대에 형제 서화가로서 이름 있는 예는 일중・여초 형제가 유명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오늘날은 오로지 서화로서만 생활과 예술 영

역을 추구해 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상황이다. 그런데 이 길

을 굳건히 걸어가며 치열하게 연찬하여 마침내 득명(得名)하는 데 성

공하였으니, 이 삼 형제야말로 거창 신씨 명문가의 명성을 잇고, 영남

서화계는 물론이요 한국 예단의 든든한 대들보로서 역할을 담당한 인

재로 평가받을 것이다.

삼 형제의 작품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획질에서 운미(韻味)와 선

미(禪味)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이들이 태어나고 자란 거창이란 고장

의 산 좋고 물 좋은 지리적 영향이다. 예로부터 인걸(人傑)은 지령(地

靈)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들의 성정(性情)은 진실하고 후덕(厚德)하

다. 그래서 욕심이 없는 무기교의 순미(淳美)와 박미(朴美)가 이들 형

제의 미학 세계를 이룩하였다. 또 그것이 가장 큰 예술적 자산이자 성

취라고 본다. 

맏형인 석정(石靜) 신정범은 경상남도 거창 산촌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서예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서예를 대했고 거창에서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부산의 우사 박현진 선생을 찾아 유학길에 오른다. 부

산 브니엘 고등학교 미술부에서 글씨와 그림을 동시에 했는데 1979년

21살의 나이에 국전에 한글서예로 입선하는 쾌거를 이루어 낸다. 

그 당시의 국전이라는 것은 요즘에 이야기하는 미술대전의 개념과

달라 입선이라는 경력만으로도 미술계에 회자가 되었던 시절이었으니

상상해 볼 만하다. 

이후 대구 계명대학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재료에 대한 연구와 화론

및 화법을 통한 글씨의 묘미를 찾아가게 된다. 특히 한글서예는 그간

한문 서예의 필력으로 다져진 농창농창한 붓질이 시선을 끈다. 

작품의 선구(選句)는 짧고 간결하며 평담(平淡)하다. 〈맑은 가난 /

 2

아뿔사 / 진짜 / 쉿 / 사뿐 / 그저 / 이야 / 언뜻 / 사뿐〉 등 지금까지 한

글 작품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소박한 글귀들은 순진한 작가의 심리상

태를 반영한 허허로운 자연회귀임를 나타낸다.

둘째 신형범 또한 맏형 못지않게 서예에 대한 필재가 대단한 인물이

었다, 하지만 그는 글씨가 아닌 그림을 선택하고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하여 서화에 천착하였으며 그 천부적 재능은 대

구라는 지역 사회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초기의 화풍은 한때 유행했던

비구상 위주의 추상화 작업이었으나 90년대 후반부터 반추상의 형태

를 가진 산수에 몰입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삶의 거

처가 대구 시내에서 청도로 이사를 하고 터전을 마련한 상황과 무관하

지 않다고 본다. 

그의 스승 故 이영석 교수는 “그는 재주가 뛰어나다. 그림의 생리를

알고 그 결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있다. 흥이 한참 올라 있는

그는 그 흥을 자기 것으로 조율하고 있다. 자신의 고유한 밭을 갈며 우

주를 꿰뚫는 고유한 시점을 추구하고 있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한지에 먹만으로 흑백 조형한 작품 시리즈는 동양적 철학의 은유적

기호이며 거친 마티에르 바탕에 내리쏟는 폭포는 우주를 꿰뚫는 시점

의 거대한 자아(自我)와 자연의 대결이다.

셋째 신재범은 위 두 형제의 영향 아래 서예를 자연스레 익히게 된

다. 비록 두 형과 달리 미술대학이 아닌 지리학을 전공하였으나 대학시

절 부터 붓을 놓지 않고 맏형인 석정 신정범의 서실에서 꾸준히 연마해

온 걸로 안다. 군 제대 후 큰 형의 추천으로 서울의 초정 권창륜 선생과

사승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로부터 장곡의 글씨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북위의 웅장함과 한비의 골격을 비로소 이해하고 갑옷을 입게 되는

운필의 획기적인 변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소득이 아닐 수 없겠다. 

글씨는 그의 스승 故 초정(艸丁) 선생께서 “고전(古篆) 금문(金文)

계열은 수준이 매우 뛰어나고 행서의 경우 사심 없이 진솔하게 물 흐르

듯이 평온한 법상(法象)이 자연스럽다. 선조와 묵색 및 포치 등에서 청

담(淸淡)한 무욕(無欲)의 제작 의도가 돋보인다고 호평하였다.

 ‘둥근 세모’ 삼 형제전은 순미(淳味)와 박미(朴味)의 둥근 조형 속에

결을 달리하는 개성의 밭을 아름답게 잘 경작하였다. 이들의 묵향이 더

욱 장대해지고 영원할 것을 염원하면서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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