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에서 피어난 운명적 만남
1573년(선조 6년), 최경창이 함경도 경성에 북도평사로 부임했을 때, 연회의 자리에서 홍랑과 처음 마주쳤다. 홍원 출신의 관기였던 홍랑은 최경창의 시를 읊으며 자연스럽게 그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그의 막중(幕中)에 머물며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이듬해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자, 홍랑은 그를 쌍성까지 배웅했고, 이별의 슬픔을 담은 시조 한 수를 지어 전했다.
“묏버들 갈ᄒᆡ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ᄃᆡ자시ᄂᆞᆫ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밤비에 새닙곳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이 시는 훗날 최경창에 의해 한시로 번역되어 그의 시집 『고죽집』에 ‘번방곡(飜方曲)’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파직으로 끝난 재회, 그리고 또다시 이별
1575년, 최경창이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만에 한양으로 달려가 병상 곁을 지켰다. 그러나 당시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명종비 인순왕후의 국상 기간이 겹쳐 이 일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최경창은 파직되었고, 홍랑 역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 사랑
1583년, 최경창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홍랑은 파주로 향해 그의 묘를 찾아갔다. 수척한 모습으로 무덤을 지키며 애틋한 마음을 전한 그녀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창의 시집 원고를 등에 지고 피란길에 올라, 그의 작품을 보존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생전 그녀는 “나를 임 곁에 묻어주오”라는 유언을 남겼고, 해주 최씨 가문은 이를 받아들여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아래에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신분의 벽을 넘은 마지막 동행이었다.
사랑의 흔적, 파주에 남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다율동 해주 최씨 선산에는 최경창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 아래에 홍랑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은 매년 제사를 지내며 그녀의 절절한 사랑과 충절을 기리고 있다. 묘소 입구에는 그녀가 지은 시조를 최경창이 번역한 '번방곡'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전해준다.
1절
쓰라린 이별에 우는 밤 버들가지 꺽어 보내노라
진한 사랑 진한 정을 어이두고 떠나갔나요
백년이 흘러가도 천년이 가도 나는 그대 여자 랍니다
객창 에피는 묏 버들 보면 날인가 홍랑 인가 여기소서
백년이 흘러가도 천년이 가도 나는 그대 여자 랍니다
객창 에피는 묏 버들 보면 날인가 홍랑 인가 여기소서
2절
소리없이 울면서 지샌밤 방울방울 뛰워 보내노라
진한 사랑 진한정을 어이두고 떠나 갔나요
백년이 흘러가도 천년이 가도 나는 그대 여자 랍니다
객창에 우는 두견새 보면 날인가 홍랑인가 여기 소서
홍랑 연속 10번듣기 https://youtu.be/7elszL_gA44?si=h7RDkG1MJ9xmaP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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