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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시와 술이 만났으니

등록일: 2024-08-21


 

고등학교 동창 중에 서울 어느 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학창 시절 이 친구는 문학청년이었습니다. 친구의 어릴 적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교직으로 세상에 나아가 이제는 교장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의 나침반이 되고 그들의 꿈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이 친구의 재미있는 버릇을 전해 들었습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작은 배낭에 막걸리 한 병과 새로 나온 시집 한 권을 넣고 인근 산으로 간다고 합니다. 산에 올라 시집 한 권을 다 읽으면 내려온다고 하네요. 아마도 산 속 어느 편한 자리를 잡고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시를 읽어나갔으리라 짐작됩니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겠지요. 통제와 질서의 담 안에서 숨 막히게 사는 자신에게 숨길을 터 주는 그런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시와 술이 만났으니까요.

 

여기까지 읽으면, ‘뭐 그렇게 재미있는 버릇도 아닌데’ 할 수도 있겠네요. 친구는 산에서 읽은 시집들을 그 다음 날에는 바로 지인과 학생들에게 선물한다고 하는데, 아! 그렇게 읽은 시집이 얼마며 또 그렇게 선물한 책들이 얼마나 많을까에 생각이 미치니 무릎이 탁 쳐집니다. “니가 바로 시인이다.” 

 

현실이라는 감옥을 무너뜨리고, 금기의 벽을 깨고, 통념이라는 담을 넘으려면 자유와 상상력의 날개가 펼쳐졌을 겁니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대왕고래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해인사 대적광전의 벽화를 깨고 백련선사의 호랑이가 날아오르고, 이중섭의 성난 황소가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런 시적 자유를 느꼈을 겁니다.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만으로 모든 고민을 다 털어 놓고 자유로워진 느낌, 해방된 느낌을 만끽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의 기억과 함께 시집을 주위에 나누어 주었겠지요.

 

이 한여름에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시집을 배낭에 넣고 동림청선(東林聽蟬)의 여름을 나고 있을 친구에게 부채와 시 한 편 전합니다.

 

 

시의 유언

 

내 인생에 후회라면

시를 좀 더 많이 읽지 못한 죄다

 

손에 만져지는 그 어떤 것을 

다음 생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스무 살로 다시 돌아간다면

더 많은 시를 읽고

시 언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히도록

마음에 더 많은 여백을 만들고 싶다

 

행복한 순간의 기억 

사람에 대한 그리움

어느 봄날의 꽃향기

 

다음으로 가는 길

오직 이런 것들로만 채워 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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