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항기·윤복희 남매의 노래와 인생"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남매가 있다. 오빠 윤항기는 국내 첫 록 밴드를 만들었고, 동생 윤복희는 미니스커트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들 남매의 삶을 들여다보면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대중문화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록의 전도사, 윤항기의 개척정신
1943년 충남 보령 출생인 윤항기는 한국 록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1964년 결성한 '키 보이스'한국의 비틀즈라 들으며 트로트가 주류였던 시절, 서구의 록 사운드를 국내에 처음 선보였다. '그녀 입술은 달콤해' (번안가요)라는 첫 앨범은 단순히 음반을 넘어 시대정신을 담은 문화적 선언이었다.이후 솔로전향하여 장밋빛 스카프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행복 합니다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전환점은 1986년이었다. '웰컴투코리아'를 마지막으로 화려한 무대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한 것이다. 음악에서 신앙으로의 삶의 무게중심 이동은 그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닌 진정한 구도자였음을 보여준다. 28년 만인 2014년 목회자 은퇴 후 다시 마이크를 잡았을 때, 그의 목소리엔 세월이 주는 깊이가 더해져 있었다.
파격의 아이콘, 윤복희의 용기
동생 윤복희는 더욱 극적인 삶을 살았다. 1946년생인 그녀는 5세에 뮤지컬로 데뷔해 세계 무대까지 진출한 천재 가수였다. 하지만 그녀를 진정 역사에 남긴 건 1967년의 미니스커트였다. 여성이 다리를 드러내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보수적 사회에서 그녀의 패션은 폭탄선언이었다. 정부가 줄자로 치마 길이를 재며 단속에 나설 정도였지만, 이는 곧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됐다.
'여러분'은 그녀의 대표작이자 오빠 윤항기가 작곡한 남매 합작품이다. 1979년 서울 국제가요제 대상작인 이 곡은 시간이 흘러 임재범을 비롯한 후배 가수들이 재해석하며 불멸의 명곡이 됐다.
사랑과 상처, 그리고 성찰
윤복희의 사생활은 파란만장했다. 가수 유주용과의 첫 결혼은 생방송 중 깜짝 약혼식으로 시작됐지만 7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남진과의 재혼 역시 3년으로 끝났는데, 훗날 그녀는 이를 '복수를 위한 결혼'이었다고 고백해 충격을 줬다.
특히 남진에 대한 그녀의 사과는 진정성 있는 참회였다. "남진의 순진성을 이용했다"며 "평생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한 고백에서 우리는 한 인간의 깊은 성찰을 본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예술혼
현재 80세인 윤복희는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거의 잃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후배들에게 남긴 유언은 시적이다. "죽으면 화장해서 그 가루를 여러 바다에 나눠 뿌려 달라. 마지막에는 넓고 푸른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
한국 대중문화가 K-pop으로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뿌리에 있는 이런 개척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윤항기·윤복희 남매가 뿌린 씨앗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찬란한 꽃이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예술혼을 잃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문화인의 품격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