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대학이 대학으로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거창대학 개교 초기, 빈자리를 앞서 채운 선행의 만학도
1996년, 막 문을 연 거창대학은 캠퍼스는 있었지만 학생 문화도, 공동체도, 기반도 거의 없던 시기였다. 이 새롭고 허전한 공간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만학도 김덕선이었다.
그는 초대 학생대표이자 초대 총학생회장을 맡았지만, 그 직책은 이름만 있을 뿐 실질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직무를 기다리는 대신, 학생들이 무엇을 불편해하는지부터 살펴보고 손을 움직였다.
동아리 연습실이 없어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는 지역의 유흥주점을 빌려 연습 공간을 확보했고, 거창악우회와 지역 예술인들을 찾아다니며 재능기부를 부탁하고 대학 문화 형성의 틀을 만들었다. 그 시절 대학 신입생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그는 스스로 찾아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대한민국에서도 흔치 않은 ‘개교 첫해 대학축제’였다. 정식 예산은 부족했고, 도와줄 인력도 충분치 않았지만 김덕선은 사비를 털어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고, 지역 예술계와의 연결을 통해 축제를 현실로 만들었다. 그 시도를 기억하는 당시 구성원들은 “그가 없었다면 첫해 축제는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졸업 후에도 그는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초대 총동문회장을 맡아 장학금을 만들고, 캠퍼스 공원 조성에 기부하며 거창대학의 기반이 자리를 잡도록 조용히 도왔다. 오늘 캠퍼스 한편에 세워진 ‘자랑스런 동문 기념석’은 그가 보여준 초창기 노력의 흔적이기도 하다.
김덕선의 이러한 모습은 대학 바깥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보다 현장에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먼저 살폈고, 도움을 요청받으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지역행사에서 보이지 않는 일들을 맡아 채웠고, 때로는 어려운 민원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행보를 지켜본 이들은 그를 특정 직책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상황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평가는 칭찬이라기보다 그의 삶의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관찰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시간이 지나며 조용한 신뢰로 이어졌다. 그가 보여준 일관된 행동 “과한 말보다 필요한 행동을 앞세우고, 자리를 앞세우기보다 현장을 선택하는 방식”은 그를 지역사회에서 한결같은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거창대학 개교 초기,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공간 속에서 만학도 한 사람이 먼저 빈칸을 채우기 위해 뛰어들었던 기억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김덕선이라는 이름이 이후 지역 곳곳에서 ‘공동체의 빈자리를 먼저 채우는 사람’으로 불리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지역의 빈 공간을 채우며 어깨 가득 짊어진 맏형의 참 모습
거창대학을 졸업한 뒤 김덕선은 자연스럽게 학교를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던 지역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빈칸’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보았다. 그 빈칸은 학교 생활과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정작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자리들이었다.
초대 총동문회장을 맡은 그는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마련부터 시작했다. 장학금 제도가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작은 금액조차 학생들에게 크게 느껴지는 시절이었다.김덕선은 동문들을 설득하고, 때로는 스스로 앞장서며 조용히 장학금의 기반을 마련했다.이것은 동문회가 단순한 조직을 넘어 ‘후배를 돕는 공동체’로 자리 잡는 첫 걸음이었다.
캠퍼스 환경개선 또한 그가 놓치지 않았던 과제였다. 학교는 막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이었고, 학생들이 쉬고 모일 수 있는 공간도 부족했다. 그는 공원 조성 기부에 직접 나섰고, 오늘도 거창대학 한편에 자리한 ‘자랑스런 동문 기념석’은 그때의 노력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흔적일지 모르지만, 학교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데에는 그의 조용한 관심과 실천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학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졸업 후 김덕선의 삶은 ‘학교에서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지역 행사에서 인력이 부족하면 이름을 남기지 않고 뒤에서 도왔고, 어르신이나 이웃의 불편 이야기가 들리면 직접 확인하러 달려갔다. 어떤 자리에서는 해결사였고, 어떤 자리에서는 묵묵한 조력자였다. 그는 도움을 주는 사람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움직이는 쪽을 선택했고, 이러한 선택은 일회성이 아니라 그의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반복되었다.
그를 오래 본 주민들은 그의 성향을 직함이나 역할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필요하면 움직이는 사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과장된 평가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일관된 삶의 태도에서 나온 조용한 관찰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특별한 봉사나 헌신으로 설명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때 그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는 식으로 담담히 말하곤 했다.
이러한 행동들이 하나둘 쌓이며 지역사회는 그를 특별하게 보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믿음이 가는 사람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의 움직임은 누군가의 기대나 지지를 바라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필요와 상황이 앞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발을 내딛는 방식이었다. 그에게는 ‘주목’보다 ‘필요’가 우선이었고, 그는 그 필요를 발견하면 오래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움직임은 지역민들 사이에서 김덕선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늘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누군가를 대신해 앞에 설 때는 조용히 서고, 누군가를 받쳐야 할 때는 뒤에서 묵묵히 지탱했다. 그의 이름이 지역 곳곳에서 “책임 있게 움직이는 사람”으로 회자된 것도 어떤 감정적 지지보다 오랫동안 쌓인 신뢰의 결과였다.
그의 졸업 이후의 행보는 한 사람의 생활방식이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신뢰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꾸준했고, 누군가는 지나쳤을 자리에 그는 흔적을 남겼다. 그 조용한 흔적들은 이후 여러 활동의 기반이 되었고, 지역 주민들이 그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필요했던 시절, 일등으로 움직인 사람
2010년대 중반, 거창·합천·함양 지역에서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의 교육을 어디서,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가”였다. 중증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가 가까이에 없던 탓에 부모들은 먼 도시로 이동해야 했고, 통학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교육 이전에 이미 큰 부담이었다.
이때 가장 먼저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거창군장애인부모회 회장을 맡고 있던 김정수씨였다. 그리고 김정수 회장은 가장 먼저 함께 움직여줄 사람으로 김덕선을 찾아왔다. 그는 장애인단체 활동을 오래 해왔고, 현장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수 회장의 제안을 들은 김덕선은 조건이나 명분을 따지기보다 “이 일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자 곧바로 참여를 결정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특수학교 공동유치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교육청은 창원 진해구와 밀양시를 후보지로 논의 중이었지만 지역 갈등이 격화되며 추진은 사실상 멈춰 있었다. 이 공백 속에서 김덕선은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바로 거창·합천·함양 3개군 통합 모델이었다. 수요를 넓게 확보하고 행정 부담을 분산시켜 유치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이었다.
이 제안은 곧 협력 체계를 만들었다. 국회의원, 군수, 도의원, 세 군의 장애인단체 등 여러 기관이 힘을 보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은 서류나 계획이 아니라 현장의 이해를 얻는 일이었다.
특수학교 후보지가 거창군 마리면으로 검토되자 일부 주민들이 오해와 불안을 드러냈다. 정보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특수학교가 특정인을 위한 시설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누구라도 주저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덕선은 가장 어려운 지점에서 한걸음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그는 장애 관련 업무로 창원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주말마다 거창으로 올라와 이장협의회, 마을 대표, 주민들을 직접 만나 설명했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여러 마을을 돌며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했지만, 그는 불편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경남교육청 장애담당 장학사에게 요청해 정확한 자료를 받았고, “특수학교는 특정 개인의 시설이 아니라 지역의 미래를 위한 공교육 기관”이라는 점을 주민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잘못된 정보가 생길 때마다 그는 다시 찾아가 바로잡았다.
이 과정을 지켜본 한 관계자는 말했다. “누가 먼저 하라고 한 일이 아니었는데, 필요한 자리라면 반드시 가는 사람이었다”고. 유치는 결국 성공했다. 오늘의 ‘나래학교’가 그 과정의 결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김정수 회장과 함께 김덕선의 이름이 지금도 조용히 회자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 활동을 성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어려운 일일수록 뒤로 물러서지 않고 움직였던 사람” 이라는 방식으로 기억한다. 그의 행동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절실한 상황을 마주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특수학교 유치 과정은 김덕선의 삶에서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일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처럼 지역 주민들도 이를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다. 다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행동을 했던 사람”이라는 기억만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년 넘게 이어진 불편을 끝내기 위한 솔선수범
특수학교 유치가 확정되던 시기, 지역 장애인단체 내부에는 또 하나의 오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지체·시각·농아인 단체의 ‘20년 넘게 이어진 열악한 사무환경’ 문제였다. 공간은 흩어져 있었고, 이동은 불편했다. 때로는 장애유형과 전혀 맞지 않는 구조에서 업무와 상담이 진행되기도 했다.
지체장애인 사무실은 노후한 건물 뒤편 작은 공간이었고, 난방과 냉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때도 많았다. 시각장애인 사무실은 엘리베이터 없는 2층에 있었고, 농아인 단체 또한 지역 여러 곳을 전전하며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다. 누구나 “고쳐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누가 먼저 나설지는 불확실한 문제였다.
그때 김덕선은 이 문제를 단순한 공간 불편이 아니라 지역 복지의 기본 틀과 연결된 과제로 보았다. 각 단체가 한 공간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장애인의 이동권, 프로그램 운영, 협력 체계 등 더 많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장애인 복합문화관 건립이라는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예산 규모는 크고, 부지 선정 과정에서는 때때로 다른 우려도 나왔다. 행정적 절차 역시 하나하나 챙겨야 했다. 그럼에도 김덕선은 서류를 준비하고, 반대 의견을 듣고 조정하고, 행정과 단체 사이의 의견이 엇갈리면 직접 설명하며 조용히 틈을 메워갔다.
특히 지방 예산이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그는 여러 차례 도청과 국회를 찾아가 필요성을 설명했다.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직접 작성한 계획서를 들고 다시 찾아가던 모습은 당시 관계자들 사이에 오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과정을 지켜본 한 인사는 “그 일을 안 해도 되는 사람이었는데, 필요했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덕선은 지회장으로 재임하던 40개월 동안 업무비 상당 부분을 스스로 부담했고, 단체 운영을 위한 각종 비용과 물품을 누적 5천만 원가량 기부했다. 재정자립도가 거의 없던 시절 이 기부는 단체의 기반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복합문화관은 건립되었고 흩어져 있던 세 단체가 하나의 쾌적한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단순한 건물을 넘어 20년 동안 누적된 불편과 고립을 해소한 지역 복지의 전환점이 되었다.
시설을 이용하는 한 회원은 “누군가가 먼저 책임지고 나선 덕에 우리가 이렇게 모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과장된 칭찬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불편을 경험한 이들이 그 과정을 지켜보고 남긴 소박한 평가다.
지역에서는 김덕선을 특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대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먼저 나서는 사람”
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한 일을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았기에 많은 부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를 가까이에서 본 이들은 그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다.
침묵과 헌신의 흔적, 그리고 ‘바보 같은 삶’이야기
장애인 복합문화관이 완공되고 단체들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된 뒤, 김덕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홍보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역할을 앞세우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은 ‘조용히 일한 사람’이라는 사실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회장으로 활동하던 40개월 동안 그는 단체의 크고 작은 일을 가까이에서 챙겼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미루지 않고, 누군가가 나설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의 업무까지 자연스럽게 돕고, 현장에서 불편이 있으면 직접 살피며 해결의 방향을 찾았다. 그는 누가 알아주든 말든 필요한 일을 먼저 하는 태도로 단체 안팎의 신뢰를 쌓아갔다.
당시 함께 일한 관계자들은 그의 기여를 숫자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필요한 순간, 아무 말 없이 움직였던 사람” 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누가 보든 말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는 먼저 발을 내디뎠고, 그 행동은 시간이 지나며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덕선의 삶을 관통하는 태도는 빛나는 성과보다 이유와 필요에 더 가까웠다. 특수학교 유치를 도왔던 것도, 복합문화관 건립 과정에서 뛰었던 것도, 장학금을 마련하거나 단체의 기반을 채운 것도 누군가의 요청보다 “저 일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의 삶을 두고 “바보 같은 삶이었다”고 말할 때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젓는다. 그들이 보았던 ‘바보스러움’은 남들이 외면한 일을 떠안는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지역 곳곳에서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한 지역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김덕선이라는 이름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는 늘 조금 더 나아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요약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표현이다.
지역사회는 그를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이들이 멈춰 있을 때 조용히 한 발 더 내딛는 사람, 자리를 앞세우지 않고 필요한 일에 몸을 먼저 기울이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의 하루는 늘 바쁘다. 타고난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거창읍 주민자치 회장과 소임을 사명으로 삼고 거친 하루를 날개짓하듯 이어나가고 있다.
(질문) 안녕하셔요.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답) 아, 네. 반갑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거창에서 가장 인기 좋은 사람으로 분류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질문) 요즘 거창읍 주민자치회가 일취월장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회장님만의 노하우라도 있으십니까?
(답) 허허, 그래요?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민 모두가 내 일이라는 마음으로 단합하고 솔선수범해 준 덕분입니다.
(질문) 주민자치회장을 맡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답) 우리 주민들께 편익을 제공하고, 소외 계층과 이웃 주민들이 누려야 할 권리와 행사들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아 늘 마음 한구석이 아팠습니다. 다 같이 잘 사는 우리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질문) 앞으로 주민자치회가 거창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또 향후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앞으로도 주민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생활과 밀접한 현장 중심의 활동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특히 소외된 이웃을 살피고 마을 공동체가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주민 여러분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질문) 그동안 봉사와 희생도 많이 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굳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답) 허허,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본래 봉사라는 것이 제 마음 편하려고 하는 것이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면 오히려 제가 더 기분이 좋아집니다.
(질문) 혹시 거창을 위해 더 큰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답) 허허, 제가 저를 잘 압니다. 앞으로도 소박하게, 낮은 자세로 살까 합니다.
(질문) 마지막으로 거창군민을 위해 하시고 싶은 바람이나 특별한 말씀이 있으십니까?
(답) 한 해 동안 부족한 저를 믿고 따라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시기에 올 한 해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새해에도 우리 주민자치회원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