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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만 되면 어김없이 — 우리 동네 가요제의 계절

등록일: 2026-03-26


봄이 오면 꽃이 핀다. 그리고 봄이 오면 어김없이 또 다른 것도 핀다. 바로 마이크를 향한 거창 사람들의 '숨겨진 끼'다. 겨우내 조용하던 동네가 3~4월만 되면 갑자기 술렁인다. 여기서도 가요제, 저기서도 노래자랑. 옆집 아저씨는 슬쩍 목을 풀기 시작하고, 경로당 어르신들은 은근슬쩍 선곡을 고민하신다. 따지고 보면 가요제는 단순한 노래 경연이 아니다.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평소 위계와 역할로 나뉜 공동체가 '무대'라는 특수한 공간을 매개로 일시적으로 수평화되는 현상에 가깝다. 가요제는 이미 거창 봄 축제의 심장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가요제라고 다 같은 가요제가 아니라는 걸, 경험 있는 분들은 이미 잘 아신다.

면 단위 벚꽃 가요제나 면민 체육대회 가요제는 솔직히 말하면 '실력 대회'가 아니다. 박자가 조금 틀려도 괜찮고, 음정이 살짝 올라가도 괜찮다. 음악 심리학에서는 이를 '수행 불안의 공유'라 부르기도 한다—실수를 함께 웃어넘기는 경험이 오히려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신나게 무대를 즐기느냐'다. 경쾌한 노래에 어깨춤 한 번 덩실 곁들이면, 심사위원보다 관객이 먼저 일어선다. 이런 자리에서는 평소 마을을 위해 묵묵히 일해 온 분이 상을 받기도 하고, 엉뚱한 분장으로 온 동네를 배꼽 잡게 만든 참가자가 인기상을 휩쓸기도 한다. 동문회 가요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행사 준비하느라 고생한 총무 선배가 대상을 받는 건 이미 불문율 아닌가.

그러나 '전국 가요제'는 차원이 다르다.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이 무대는 가수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관문이자 전쟁터다. 타 지역 참가자들이 잔뜩 몰려오는 판에 그냥 노래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발라드 한 곡으로 심사위원의 눈시울을 적시거나, 무대 장악력 하나로 관객을 사로잡는 전략이 필요하다. 보컬 코치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가장 중요한 건 '곡 선택'—아무리 완성도 높은 곡도 자신의 음역대(vocal range)를 벗어나는 순간 무대 위에서 처참히 무너진다. 자신의 키(Key)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곡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전국 무대에서의 첫 번째 생존 법칙이다.

그나저나 전국에 가요제 이름도 참 많다. 강감찬 가요제, 처녀뱃사공 가요제, 배호 가요제, 독도사랑 가요제……. 이름만 들어도 그 고장의 역사와 정서가 풍긴다. 지역 가요제가 단순한 문화 행사를 넘어 지역 브랜딩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이 이름들은 잘 보여 준다. 우리 거창은? 거창하게 한번 만들어볼 만 하지 않겠나. '거창 가요제'라는 이름 하나면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 이름값이 있어야지.

결국 가요제는 노래 경연이 아니다. 오랜 이웃이 한자리에 모이고, 서먹했던 사람들이 박수 한 번에 가까워지는 축제다. 무대 위 노래 한 곡이 공동체 하나를 묶어 주는 구심력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생애 첫 무대이고, 어떤 이에게는 두고두고 꺼낼 봄날의 이야깃거리가 된다.

올봄도 거창 곳곳의 무대 위로 노래가 흐를 것이다. 이미 선곡을 마친 분들, 목 관리 잘 하시고. 아직 망설이는 분들, 올해가 바로 그 해다. 무대는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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